▣시서화첩(詩書畵帖)/서첩(書帖)

고문

woosanje 2013. 12. 4. 12:09

 

창힐(蒼頡)은 새의 발자국을 보고 조적서를 만들었고, 전욱(顓頊)은 과두문(蝌蚪文)을, 주(周) 나라의 매씨(媒氏)는 분서(墳書)를 만들었으며, 백씨(伯氏)는 종정문(鐘鼎文)을 본뜬 수서(殳書)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자(奇字) 고문이 있으나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른다.
사주(史籀)는 고문을 고쳐 15편의 주서(籀書)를 만들었으며, 헌원씨(軒轅氏) 이래 인서(麟書)ㆍ봉서(鳳書)ㆍ구서(龜書)ㆍ용서(龍書)ㆍ가화서(嘉禾書)ㆍ운서(雲書)ㆍ조서(鳥書)ㆍ성문서(星文書) 등의 문자는 기린ㆍ봉 등 상서로운 물체를 기념 삼아 만들었을 뿐, 사용할 수 없는 글자이다. 진(秦) 나라 때 이사(李斯)는 소전(小篆)을 만들었고, 정막(程邈)은 예서(隷書)를 만들었다. 예서가 나옴으로 해서 고문이 없어지게 되니, 그후로 세상에서 고문을 그리게 되었다.
한(漢)ㆍ당(唐) 이래 나온 문자가 모두 14종인데, 지영(芝英)ㆍ비백(飛帛)ㆍ금조(金錯)ㆍ옥저(玉筯) 따위가 7종이며, 조희(曹喜)ㆍ유덕승(劉德昇)ㆍ왕희지(王羲之)ㆍ위관(衛瓘)ㆍ위탄(韋誕)ㆍ사유(史游) 등의 것이 또한 7종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고문이 아니니, 진(秦)ㆍ한(漢) 이후로 풍기(風氣)가 천박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태호(太昊)의 예스러운 기풍이 진 나라 때에 없어지고 한 나라를 지나면서 나머지마저 다 없어졌으니, 애석하다.

먼 옛날 창힐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어 조적서를 지었고, 신농씨(神農氏)는 수서(穗書)를, 황제씨(黃帝氏)는 운서(雲書)를, 전욱씨(顓頊氏)는 과두문자를, 무광(務光)은 해서(薤書)를 각각 만들었다. 또 기자 고문이 있으나 너무 오랜 것이어서 알기가 어려웠는데, 한 나라 때 양웅(揚雄)이 기자를 알아보았다. 봉서ㆍ구서ㆍ용서의 문자들도 모두가 고문을 따라 상서로운 물체를 기념 삼아 만든 글자이다.
주(周) 나라 때 매씨는 분서를 만들었고, 백씨는 홀기문(笏記文)을 만들어 수서라 하였는데, 이 수서도 옛사람의 종정 고문을 본떠 만든 것이다. 종정문은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나 삼대(하(夏)ㆍ은(殷)ㆍ주(周)) 당시에 이를 사용하였다. 사일(史佚)이 조서(鳥書)를, 사성(司星) 자위(子韋)가 성서(星書)를, 공자 제자 신씨(申氏)가 인서를 각각 만들었는데, 모두 구서ㆍ용서의 고문을 따른 것이다. 사주(史籀)는 고문을 고쳐 15편의 주서를 만들었고, 진 나라에서는 고문을 뜯어고쳐 전각 글자 팔체서(八體書)를 만들었다.
승상 이사가 소전을 만드니, 시황제(始皇帝)가 형석(衡石)으로 공문서를 헤아릴 만큼 문서가 번거로웠다. 상곡(上谷)의 왕차중(王次仲)이 고문을 고쳐 글자를 만들었는데, 예인(隷人)의 도움을 받아 글씨를 썼다 하여 예서(隷書)라 불렀다. 어떤 이는, 정막이 만들었는데 막이 예인 출신이기 때문에 예서라 한다 하였다. 예서가 만들어짐으로써 고문은 없어졌다. 정막은 또 소전을 다듬어 상방전(上方篆)을 만들어 인새(印璽)에 사용하였다. 왕차중은 예서를 간추려 팔분(八分)을 만들었는데, 이는 예서에서 8분을 떼어 버리고 소전에서 8분을 따서 만든 것이라 한다.

진(秦) 나라의 호무경(胡毋敬)이 대전을 소전으로 고쳤고, 한 효무제(漢孝武帝) 때에 감천(甘泉)에서 지초(芝草)가 나자, 진준(陳遵)을 시켜 지영전(芝英篆)을 만들었다. 조희(曹喜)는 수로전(垂露篆)을 만들고 또 현침전(懸針篆)을 만들어 오경편목(五經篇目)을 썼다. 당(唐) 나라 때에 벽락전(碧落篆)이 있었는데 소전과 같았다. 이양빙(李陽氷)이 옥저전(玉筯篆)을 잘 썼는데 후세에 이것이 사용되었다.

노(魯) 나라 추호(秋胡)의 아내는 누에를 보고 조충전(雕虫篆)을 만들었으며, 한(漢) 나라 때는 곡두전(鵠頭篆)이 있었다. 위탄(韋誕)이 전도전(剪刀篆)을 만들었는데, 이는 사유(史游)가 그 기준[極]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유덕승(劉德昇)은 성문(星文)을 보고 영락전(纓絡篆)을 만들었으며, 채옹(蔡邕)은 어떤 사람이 솔[帚]질 하는 것을 보고 글씨를 고안하여 비백 문자를 만들었다. 위탄은 또 금조(金錯)ㆍ고전(古錢)을 만들었다. 진(晉) 나라의 위관(衛瓘)은 3대에 걸쳐 글씨를 연구하여 유엽전(柳葉篆)을 만들었다. 왕희지(王羲之)는 비(飛) 자의 모양이 용의 발톱과 같음을 보고 용조서(龍爪書)를 만들었다.